2008년 12월 26일
커피
진한 향기가 잦아 든다. 10년 동안 머릿속에서 맴돌던 그 냄새가 후각으로 들어왔다. 내 몸에 촉수라도 생긴 것인지 또 이 곳이다. 짙은 갈색의 매끈한 통나무가 잘 다듬어진 한 카페. 사람들은 옆에 있는 큰 길이 더 편한지 이 작은 골목으로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만나는 곳은 같은데도 말이다. 낯설지 않은 냄새가 풍긴다. 카페의 한 귀퉁이에 쩍쩍 갈라진 '보리숲' 이란 늙은 나무팻말은 그대로였다. 통나무는 새롭게 기름칠을 했는지 번쩍번쩍 거리고 안쪽은 리모델링을 했는지 하얀 인테리어에 모던한 느낌까지 풍긴다. 커다란 유리문 너머로 새로 카페를 운영하는 듯한 여주인 얼굴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도, 까페모습도 모두 달라졌는데 안쪽에서 그 때와 같은 커피향이 뿜어져 나왔다.
'인사해, 새로 만나는 사람이야.'
'........'
'이쪽은 장민석, 여긴 김동현.'
'.........'
깔끔한 브이넥 스웨터에 진한 고동색 바지를 입은 그 남자가 먼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S 기업에 다니고 있는 김동현입니다.'
낮은 저음때문인지 탁자가 미세하게 떨린다. 자상함이 묻어나는 말투이지만 그 속에는 상대를 제압하는 힘이 실려 있다. 또박또박 박힌 눈 코 입은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날카로움이 베어 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만을 응시했다. 내 눈망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탁자 아래에선 애꿎은 휴지만을 만지작 거릴뿐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 방법 밖에는 없었어, 미안해.'
내 표정을 살피는 듯 하더니 이내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이건 미안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것 뿐이었다. 붙지도 않은 사시에 6년의 세월을 쏟아부은 내가 바보였다. 그녀가 미안할 이유는 없었다. 헤어지고 싶어하던 그녀의 마음을 무시해온 것은 나였다. 시험에 붙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달라고 한 것은 순전한 내 이기심이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삐용~삐용~삐용~]
한 참을 서 있었다. 주변의 정적에 시간이 멈춰버린 줄 알았다. 몇시간을 그렇게 서있었는지 모르겠다. 앰뷸런스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고막을 울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굴을 돌린 아주머니와 두꺼운 외투를 꽁꽁 싸매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 바퀴를 채 둘러보지 못했는데 내 손에 차가운 물질이 닿았다. 손이 언 것인지 더이상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10년만이다. 10년 세월에는 강산도 변한다더니 공기부터 달라진 것 같다.
카페 문을 살며시 열며 들어갔다. 머릿속으로 의도했던 행동은 아니었다. 여주인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컵을 닦던 손을 멈춘다. 그녀의 몸에서 커피향이 뿜어져 나왔다. 10년 전 그녀의 몸을 찔렀을 때 흘러나오던 붉은 색 액체와 같은 냄새였다. 자리에 앉은 나에게 그녀는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말없이 가져다 준다.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는 악의가 없었다. 나에게 건넨 커피는 용서를 말하는 듯 했다. 내 앞에 높여진 아메리카노 향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안의 분노도 미안함도 모두 커피향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커피향이 내 몸속으로 모두 빨려 들어온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도 그 남자의 얼굴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가볍게 카페 문을 열고 밖을 나왔다. 내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또 달라졌다.
# by | 2008/12/26 18:16 | MY WRITING★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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