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나는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실현해 낼 수 있는 과학자이다. 식물에 끊임없이 물을 공급해 주고 있다는 자극을 심어 물을 주지 않아도 마르지 않는 식물을 개발해 냈다. 나는 이미 세계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 받고 있다. 지구상에는 나의 손을 거쳐가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마지막 문명의 신이라고 부른다. 

한달 전, 일반 사람과 거의 비슷한 언어수준을 가진 로봇을 개발해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이제는 인간에게 편리함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줄 수 있어 더 뿌듯하다. 머리를 식히러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국무장관 빌 에디슨이다. 그는 내가 만든 손바닥 신문을 아주 잘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손바닥 신문은 손바닥 크기의 얇은 메모리판으로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자신이 구독하는 신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젊은이들에게만 인기가 있더니 글씨를 키워서 볼 수 있는 기능을 넣은 후 지금은 4-50대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의 용건은 이 것이었다. 그의 손자가 키우는 미셸(강아지)이 자신의 말을 안 듣는다고 자꾸 때리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셸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없냐고 물었다. 돈은 얼마든지 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에겐 더이상의 돈은 필요없었다. 내 안에는 단지 새로운 도전에 대한 호기심과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은 욕망뿐이었다. 나는 고민해 보겠다고 말하고 그를 돌려 보냈다. 로봇에 이어 식물까지는 칩을 삽입해 보았지만 이제껏 동물을 상대로 칩을 만든 적은 없었다. 나는 적잖은 고민을 했다.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칩을 만들었다. 빌 에디슨이 나를 찾아온 후 3개월만이다. 일단 나는 칩에 6가지 기능만 삽입했다. 강아지의 감각기관을 자극해 '기쁨' '슬픔' ' 심심함' '배고픔' '화남'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심심함'이란 감정은 그의 손자에게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작동법은 간단하다. 이 칩을 강아지의 뇌에 이식을 하고 내가 원하는 감정을 강아지가 가질 수 있도록 버튼만 누르면 된다. 단 스위치를 항상 켜놓아야만 하고 꺼졌을 경우, 강아지는 자유의지대로 행동하게 된다. 부작용은 버튼이 꺼졌을 때 강아지는 이전에 받은 스트레스를 기억하고 돌발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한 가지 기능은 '죽음'이다. 강아지가 돌발행동을 할 때 이 '죽음' 버튼을 누르면 강아지의 모든 뇌기능이 마비되고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나는 미셸에게 이 칩을 삽입하고 리모컨을 그의 손자에게 쥐어 주었다. 작동법을 알려주고 마지막 '죽음'의 버튼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리고 꼭 위급한 상황에만 사용하라고 일러 두었다. 

하나만 만들 생각이었는데 미셸이 전파를 타게 되면서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강아지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키우는 모든 애완동물에게 그 칩을 넣기 원했다. 이구아나, 거미, 햄스터..... 주인이 원하는 대로 감정을 표출하는 동물들이 늘어났다. 그 종도 늘어났다.

요즘은 기능을 조금 더 추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다섯가지 감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머리를 비우러 샤워를 하러 들어가는 찰나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난다. 누군가 찾아온 듯하다. 내가 처음으로 칩을 준 빌 에디슨의 손자다. 곱슬에 금발인 꼬마는 자그마한 입을 오물조물 움직이며 말한다. 그는 미셸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해 줘서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할 말이 있다고 한다. 나는 따뜻한 핫초코나 줄 요량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러자 꼬마는 대뜸 말한다. 

"우리 엄마가 내 말을 너무 안 들어요........" 




   

by 꼬수☆ | 2009/01/07 15:55 | MY WRITING★ | 트랙백 | 덧글(0)

화장실

노인은 손을 뻗어 은빛 손잡이를 잡는다.  네번째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에는 있어야 할 손톱이 없다. 오래 전부터 빠져 있었는지 손톱 끝이 둥글다. 힘없이 손잡이를 돌리며 어깨로 나무 문짝을 슬며시 민다. [삐거덕] 문이 열린다.

 [이름: 최동춘
  나이: 73세
  전직: 세탁기 수리공]

청소를 안 한지 몇 달이나 지났는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한다. 노인은 이미 후각을 잃은 것인지 냄새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때가 꼬질꼬질한 변기 위에 걸터 앉는다. 
[할아버지 왔어? 오늘은 뭐했어?]
[뭐.. 노상 똑같지. 놀이터 나가서...]
노인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다 천장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선을 멈춘다. 그리고는 바닥에있는 비누로 시선을 옮긴다. 언제 사용했던 것인지 모를 만큼 비누는 쩍쩍 갈라진채 말라있다. 
[재미있는 거 없어? 얘기 좀 해줘. 하루종일 움직이지도 못하고 갇혀 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맨날 그렇게 멍하니 앉아만 있고.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나마 요새 할아버지가 자주 와서 좋긴 하지만...]

노인이 오늘따라 왠일인지 입을 연다
[오늘은 놀이터에 앉았는데 한 꼬맹이가 지나가더라고. 그래서 '너 몇살이냐' 하고 물었더니 아 글쎄 그녀석이 '할아버지가 알아서 뭐하게요' 라고는 쌩 가버리지 뭐냐. 허허 요새 애들 참....]
노인은 계속해서 실소를 터뜨린다.

[그렇게 또 한 참을 앉았는데 공 하나가 굴러와. 옆에 학생들이 갖고 놀다가 잘 못 굴러왔나봐. 그래서 공을 주으려고 일어나는데 그새 한 녀석이 와서 잽싸게 가져가더라고. 나도 한 때는 공 좀 찼었는데 허허. 이제 일어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려.]
노인이 무릎을 만지작 거린다.

[오늘도 김영감이 안 나와서 계속 혼자 앉아 있었네. 그 양반 봄 부터 밖에 안 보이더니만 찬 바람이 불기꺼정 안 나타나네. 이제 바람도 점점 차져서 나도 이제는 바깥에 오래 못 있겠어. 다리도 시리고. 김 영감이 없으니 심심하기도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봄에 집이 어딘지라도 물어볼껄. 이젠 밥 먹을 때 말고는 입을 열 일이 없어.]

[아~그래서 할아버지가 요즘에 자주 들어오셨구나. 히히. 난 좋아요. 6년동안 여기 살면서 얼마나 심심했는데요.]

[애들은 잘 살고 있으려나. 큰 아 저번에 왔을 때 애가 몇살이었더라. 이제 장가 보낼 때는 안됐나 몰라. 잘 살고 있어야 하라 낀데. 그래도 지 애미 죽고도 잘 커가 얼마나 다행인지. 대학도 떡하니 붙고, 교수까지 됐으니 허허허. 아들 놈 하나는 내가 잘 키웠다니까. 허허허... 근데 그 무슨 미국이란델 가서는.. 뭘 그렇게 먼데까지 가서는...]
노인의 누르스름한 흰자위가 붉게 충혈된다. 그리움이 기다림이 되고 기다림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아들 얼굴과 손자 얼굴을 떠올려 보지만 아들의 어릴적 얼굴만 기억날 뿐이다. 손자의 얼굴은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노인은 머릿속에서 손자얼굴을 상상하며 그려본다. 노인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얼굴들을 하나씩 그려본다. 

둘째 명숙이 열살 때 몸쓸 병에 걸려 죽은 마누라 얼굴, 
지 오빠 등록금 때문에 지는 대학 못갔다며 울고불던 명숙이 얼굴. 그래도 명숙이는 명절되면 전화는 꼬박꼬박한다.
수리공 할 때 뒤에서 껄떡대던 사장 아들놈 얼굴, 
월급 받는 날엔 꼭 같이 대포차에 갔던 덕근이 얼굴,
지 마누라 아파서 돌본다고 일 그만두고 가버린 상도 얼굴, 
아침에 놀이터에서 본 꼬맹이 얼굴,
축구공을 쌩 하고 가져가던 녀석 얼굴,

한명씩 얼굴을 그리던 노인은 생각이 잘 안나는지 눈을 감아본다. 그리고는 한동안 미동이 없다. 그러다 몸 속의 모든 기운이 서서히 빠져나가는지 몸은 맥없이 스러진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화장실에서 쩍쩍 갈라진 비누가 노인의 죽음을 외쳐본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비누는 그 외침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이내 잠잠해진다. 석달 뒤 딸 명숙이가 오기 전까지.   
  

by 꼬수☆ | 2009/01/05 19:17 | MY WRITING★ | 트랙백 | 덧글(0)

깍두기

5평 남짓한 방에 할머니와 한 아이가 앉아 있다. 저녁밥상에는 흰 쌀 밥 두 그릇과 깍두기 한 접시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아이는 얼마전 할머니가 고물상에서 가져온 TV 앞으로 기어가 버튼을 누른다. 파란 빛이 순간적으로 방안을 가득 메운다.
  [중국에서 신종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습니다. 무에서 이 바이러스를 일으키는 원인인 독성분이 검출되었다고 하는데 이 문제의 중국산 무는 이미 국내에도 대량 유통된 상태입니다 .바이러스는 간에 침투하여 간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멍하니 TV를 바라보던 아이는 할머니를 한번 쳐다본다. 할머니는 말없이 밥그릇에 물을 부어 말아 먹는다. 

다음날 새벽, 할머니는 여느 때와 같이 고물상에 가서 리어카를 빌린다. 할머니 머릿속에는 온통 떨어진 쌀 걱정 뿐이다. 오늘은 박스가 많이 나와 5000원까지 받았으면 했다. 
아이는 여느때와 같이 아침을 먹지 않고 집을 나선다 .할머니가 어제 밤에 싸 놓은 도시락은 아침이자 점심이었다. 도시락을 책가방 가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책을 넣는다. 아이는 조금이라도 도시락이 따뜻해지길 바란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지만 늘 그랬듯 밥과 깍두기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아이말고 깍두기를 가져온 아이가 한 명도 없다. 아이는 짝꿍에게 깍두기 하나를 건네며 계란찜 하나를 바꿔먹자고 해본다. 짝꿍은 아이를 슬쩍 흘겨보더니 계란찜 하나를 그냥 건넨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깍두기 먹지 말래. 그거 먹으면 병 걸린다고.'
아이는 건네려던 깍두기를 도시락 통에 그냥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흰 밥만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는다.

할머니는 오늘 운이 좋았는지 박스가 많이 나와 6200원 을 받았다. 집에 가는 길에 수퍼에 가서 1kg 쌀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온다. 아이는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 TV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마치 TV의 파란 빛과 아이가 소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머니는 갓 지은 쌀밥과 깍두기를 내어온다. 아이는 깍두기가 먹기 싫어진다. TV에서는 중국산 무 수입을 반대하는 집회 현장이 나완다. 현장에는 아이와 같은 또래들이 촛불을 들고 나와 있다. 아이는 이제 깍두기를 먹는 것이 무서워진다.
'할머니, 깍두기 먹으면 병 걸린데.'
할머니는 밥 그릇에 물을 부으며 대꾸한다.
'누가 그캐'
'내 짝꿍 엄마도 그라고 텔레비젼도 그라잖아'
할머니는 TV를 쳐다본다. TV에는 촛불집회에 찹가한 한 아주머니의 인터뷰장면이 나온다. 
[중국산 무가 사람을 죽일 정도로 위험하다는데 왜 정부는 수입규제를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제 애들한테 깍두기도 못 먹이겠어요]
할머니는 밥그릇에 물을 다 부은 후 TV로 다가가 꺼버린다. 그리고 아이의 숟가락에 깍두기를 얹어준다.
'다 거짓 나부렁이들,먹어도 안 죽어. 저거는 내 젊을 때 양 고기도 못먹게 하드만 다 먹어도 아무도 안 죽드라. 어여 밥이나 묵으라.'
아이는 찝찝한 마음이 있지만 밥 한 그릇을 금세 다 먹어치운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리어카에 TV를 싣고 다시 고물상으로 향한다.
아이는 TV가 없어진 것을 보고 시무룩해진다. 그러나 아이는 그 이후 다시는 깍두기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by 꼬수☆ | 2008/12/29 15:57 | MY WRITING★ | 트랙백 | 덧글(0)

커피

진한 향기가 잦아 든다. 10년 동안 머릿속에서 맴돌던 그 냄새가 후각으로 들어왔다. 내 몸에 촉수라도 생긴 것인지 또 이 곳이다. 짙은 갈색의 매끈한 통나무가 잘 다듬어진 한 카페. 사람들은 옆에 있는 큰 길이 더 편한지 이 작은 골목으로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만나는 곳은 같은데도 말이다. 낯설지 않은 냄새가 풍긴다. 카페의 한 귀퉁이에 쩍쩍 갈라진 '보리숲' 이란 늙은 나무팻말은 그대로였다. 통나무는 새롭게 기름칠을 했는지 번쩍번쩍 거리고 안쪽은 리모델링을 했는지 하얀 인테리어에 모던한 느낌까지 풍긴다. 커다란 유리문 너머로 새로 카페를 운영하는 듯한 여주인 얼굴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도, 까페모습도 모두 달라졌는데 안쪽에서 그 때와 같은 커피향이 뿜어져 나왔다.  


'인사해, 새로 만나는 사람이야.'
'........'
'이쪽은 장민석, 여긴 김동현.'
'.........'

깔끔한 브이넥 스웨터에 진한 고동색 바지를 입은 그 남자가 먼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S 기업에 다니고 있는 김동현입니다.'
낮은 저음때문인지 탁자가 미세하게 떨린다. 자상함이 묻어나는 말투이지만 그 속에는 상대를 제압하는 힘이 실려 있다. 또박또박 박힌 눈 코 입은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날카로움이 베어 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만을 응시했다. 내 눈망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탁자 아래에선 애꿎은 휴지만을 만지작 거릴뿐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 방법 밖에는 없었어, 미안해.'
내 표정을 살피는 듯 하더니 이내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이건 미안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것 뿐이었다. 붙지도 않은 사시에 6년의 세월을 쏟아부은 내가 바보였다. 그녀가 미안할 이유는 없었다. 헤어지고 싶어하던 그녀의 마음을 무시해온 것은 나였다. 시험에 붙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달라고 한 것은 순전한 내 이기심이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삐용~삐용~삐용~]
한 참을 서 있었다. 주변의 정적에 시간이 멈춰버린 줄 알았다. 몇시간을 그렇게 서있었는지 모르겠다. 앰뷸런스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고막을 울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굴을 돌린 아주머니와 두꺼운 외투를 꽁꽁 싸매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 바퀴를 채 둘러보지 못했는데 내 손에 차가운 물질이 닿았다. 손이 언 것인지 더이상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10년만이다. 10년 세월에는 강산도 변한다더니 공기부터 달라진 것 같다.
카페 문을 살며시 열며 들어갔다. 머릿속으로 의도했던 행동은 아니었다. 여주인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컵을 닦던 손을 멈춘다. 그녀의 몸에서 커피향이 뿜어져 나왔다. 10년 전 그녀의 몸을 찔렀을 때 흘러나오던 붉은 색 액체와 같은 냄새였다. 자리에 앉은 나에게 그녀는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말없이 가져다 준다.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는 악의가 없었다. 나에게 건넨 커피는 용서를 말하는 듯 했다. 내 앞에 높여진 아메리카노 향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안의 분노도 미안함도 모두 커피향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커피향이 내 몸속으로 모두 빨려 들어온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도 그 남자의 얼굴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가볍게 카페 문을 열고 밖을 나왔다. 내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또 달라졌다.   

by 꼬수☆ | 2008/12/26 18:16 | MY WRITING★ | 트랙백 | 덧글(0)

시장경제가 이기적? 이타적? (조선, 이영완)

근대 사회는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가족의 붕괴와 소득의 양극화, 환경파괴 같은 어두운 그림자도 늘어났다. 과연 시장경제는 동물의 세계처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냉혹한 체제일까. 최근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시장경제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이기적 행동을 하는 사람을 견제하는 이타적(利他的) 행동이 더 발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권위적이고 종교가 지배하는 전통적인 사회일수록 오히려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STRONG>◆전통사회에 가까울수록 더 이기적 </STRONG>영국 노팅엄대의 시몬 괴히터(Gachter) 박사는 투자게임을 이용해 나라마다 이타적 행동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분석했다. 투자게임은 이렇게 진행된다. 4명이 팀을 이룬다. 각 팀원은 자신이 가진 돈을 공공재에 투자할 수도 있고, 그대로 갖고 있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1달러를 투자하면 나중에 1.6달러를 돌려받는다. 하지만 이 1.6달러는 팀원 4명이 골고루 나눠 갖게 한다. 결국 투자한 사람은 1달러를 내고 0.4달러를 돌려받는 만큼 0.6달러 손실을 입게 된다. 반대로 다른 팀원도 투자할 것이라고 믿고 4명이 함께 투자를 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팀원 중 1~2명이 투자할 경우에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한 번 투자한 팀원은 투자에 소극적인 다른 팀원을 징벌할 수 있게 했다. 자신이 이기적인 팀원을 지목하고 1달러를 내면 지목당한 팀원은 3달러를 벌금으로 내는 식이다. 징벌에 따른 1달러의 손해를 감수하고 집단을 위해 징벌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타적 징벌(altruistic punishment)'이다. '사이언스'지 7일자 표지논문으로 게재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15개국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투자게임을 실시한 결과, 나라별로 이타적 징벌의 빈도는 비슷하게 나타났다. 다만, 시장경제가 덜 발달한 권위적이고 종교 색채가 강한 국가일수록 이타적 징벌의 반대 격인 '반사회적 징벌(antisocial punishment)'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반사회적 징벌은 이타적 징벌을 당한 팀원이 반성은커녕,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많이 투자한 사람에게 역으로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투자를 많이 한 팀원이 자신을 징벌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따른 것이다. 즉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되갚는 행동이다. 우리나라 대학생은 반사회적 징벌의 빈도에서 15개국 중 7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가 아직 경제 규모에 합당한 사회 규범을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이다.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최정규 교수는 "시장경제가 잘 발달한 사회일수록 이타적 징벌을 옹호하고 반사회적 징벌을 배격하는 사회적 합의나 규범이 잘 발달해 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STRONG>◆이타적 징벌이 협동 이끌어내</STRONG> 이타적 징벌은 협동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다. 2002년 스위스 취리히대 에른스트 페르(Fehr) 박사는 '네이처'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투자게임에서 인간의 협동이 가능한 것은 손해를 무릅쓰고 이기적인 사람을 징벌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처음 투자게임에서는 서로를 믿지 못해 갈수록 투자를 적게 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이기적 행동을 보였다. 그러나 이타적 징벌을 도입하자 징벌을 하면 손해를 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 이상 이타적 징벌을 했다. 그 결과 협동이 다시 살아나 투자액이 상승하고 나중에 모두 이익을 보게 됐다. 실험 참가자들은 처음에 20프랑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평균 39.7프랑씩을 갖게 됐다. 원시부족 사회를 분석해 보면 자급자족 사회보다 고래잡이를 하는 부족처럼 협동이 필요한 곳에서 이 같은 이타적 행동이 발달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이타적 행동은 어떻게 진화해 왔을까. 최정규 교수는 지난해 10월 '사이언스'지에 게재한 논문에서 "인간의 이타적 행동이 자기집단중심주의와 결합해 진화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집단을 위해 희생하면 자신에게는 손해이지만, 그 결과로 자기 집단이 빈번한 적대적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면서 '이타적 행동'이 고취돼 왔다는 것이다. 이런 자기집단중심적 이타성은 민족·종교 간 갈등이나 국가 간 전쟁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인류는 지구온난화나 에너지 고갈처럼 개별 국가를 넘어서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집단의 의미가 전 지구로 확대된다면 이런 전 지구적 문제의 해결도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by 꼬수☆ | 2008/03/11 10:15 | 트랙백 | 덧글(0)

당신은 연예인이 아니오




<아나운서들의 움직임 이상하다>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 아나운서의 대거 투입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새롭고 독특한 변화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오락프로그램에서의 아나운서들은 낯설게만 느껴진다. 마치 뛰어다녀야할 것 같은 운동장에 하이힐을 신고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이것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기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분명 무엇인가 일반적이지 않고 새로운 변화로 인지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화제를 이슈화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것이 아주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현상이라면 이리 큰 이슈거리로 떠오르게 될 이유가 있을까.


<아나운서와 연예인은 다르다>

아나운서를 연예, 오락 프로그램의 MC로 투입하는 것은 방송국 자체 인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이므로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아나운서의 전문성을 고려한 인력투입이 아닌 아나운서를 연예인과 같은 하나의 스타로 만들어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손가락질을 받을 만하다. 이는 결국 아나운서의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나운서는 프로그램의 시청률과 방송국의 광고수입을 벌어들이기 위한 인력이 아니다. 아나운서는 사전적 의미로 정보를 알리는 사람, 특별히 올바른 표준어 사용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회적 책임을 지니고 있는 직종이다. 이는 아나운서와 연예인을 확실하게 구분 지어주는 명제이며, 따라서 아나운서는 연예인과 동등한 성질의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아나운서의 연예인화>

현재는 아나운서들이 연예, 오락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도를 넘어섰다. 단지 아나운서의 인력투입이 아닌 아나운서를 연예인화하여 상품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아나운서 팀과 연예인 팀의 오락 대결, 혹은 아나운서만으로 구성되어진 연예오락 프로그램은 충분히 그런 의심의 여지를 남긴다. 더 노골적인 형태는 아예 아나운서들이 자신의 직종을 뿌리치고, 연예인 기획사에 소속되어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아나운서의 직종에 대한 사명감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비춰진다. 몇 번의 오락 프로그램의 출연으로 연예인과 엇비슷한 인기를 얻게 되면 자연히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의 수입에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월급을 받고 출연하는 아나운서와 회당 수입을 받는 연예인과의 격차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운서를 내려놓고 연예기획사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가 아나운서로서의 사명보다는 수입에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추측함에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방송국이 연예인 아나운서를 키운다>

이러한 아나운서 인력유출은 방송국에서도 골칫거리다. 인기를 얻은 아나운서들이 프리랜서로 선언해버리고 나가면 수많은 아나운서 지원자들 가운데 우수한 인력을 힘들게 가려냈던 수고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방송국이 아나운서를 대거로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시키는 것이 한, 두 명이 외부로 빠져나가더라도 그것을 대치할 아나운서를 충분히 보유하고 보완하기 위한 장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연예,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아나운서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스타급 아나운서들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방송국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인력을 투입하는 주체라고 본다면 오락프로그램에 아나운서들의 출연이 증가하는 이유로서 이것이 전혀 근거 없이 들리지는 없다. 결국, 방송국 자체가 아나운서를 주도적으로 연예인화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아나운서 정체성을 지켜라>

지금 시대는 점점 직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복합적인 활동이 동시에 일어난다. UCC의 확산은 1인 1체제 의미를 강하게 만들었고, 이제는 인력을 분야별로 세부적으로 나누지 않고 한 사람이 계획부터 제작까지 모든 일을 담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정체성을 잃어버리라는 소리는 아니다. 모든 일을 담당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되 자신의 전문분야와 정체성은 지켜내야 한다. 이처럼 아나운서와 연예인은 명확하게 구분되어진 전혀 다른 직종이며 그들간의 상호연결은 있을 수 있지만 각각의 정체성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연예,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아나운서들을 보면 연예인들과 함께 게임을 하며 시청자들의 웃음을 주는데 동일한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화보를 찍거나 연예인들과 비슷하게 활동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아나운서인지 연예인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혹은 훗날, 이들이 드라마까지 출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든다. 이것은 분야를 넘나드는 MULTI 의 개념이 아니라 아나운서로서 이미 정체성이 흔들려버린 상태이다.



<연예프로그램의 차별화된 아나운서>

아나운서가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완전 봉쇄하라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직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다. 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정체성을 가진 아나운서가 연예인과 차별된 모습으로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나운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유연하고 적응적으로 맞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아나운서로서의 전문성을 지켜야 한다. KBS 상상플러스 ‘OLD & NEW’ 코너와 같은 것이 아나운서가 투입된 연예, 오락프로그램의 좋은 예이다. 여기에서는 아나운서와 연예인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특별히 아나운서의 전문성을 살려내 더 좋은 시너지 효과를 얻었다. 단지 아나운서가 연예인과 같이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해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문성을 발휘한 차별화된 모습을 통해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시청자들이 아나운서에게 거는 기대이다. 시청자를 웃기는 것은 연예인의 몫으로 남겨두어도 충분하다.


<사명의식을 가진 아나운서>

연예,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아나운서가 정당화되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는 범위에서 성립한다. 연예인과 차별화된 모습으로 그들의 전문성을 발휘할 때 비로소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어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아나운서에 대한 사명의식을 가진다면 연예인 기획사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처음 방송국 입사면접에서 했을 아나운서에 대한 포부가 거짓말임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자신의 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멋진 아나운서들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by 꼬수☆ | 2007/11/15 13:37 | MEDIA★ | 트랙백 | 덧글(0)

살아있는 지식(지식검색 서비스)

 


  우리는 명확하고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체계적인 명제들을 지식이라 정의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교과서에 나오는 요지부동한 정보들만을 가지고 우리는 지식이라고 하지 않는다. 개인만이 알고 있는 생각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면 바로 그것은 새로운 지식으로 작용된다. 현재는 지식이 살아 움직이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이 뛰어놀게 된 저변에는 인터넷이 존재한다. 인터넷은 바로 지식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한 포털업체가 시작한 지식검색 서비스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스스로 묻고 답하는 형식을 빌렸다. 그리고 이는 이 포털사이트를 단숨에 시장 점유율 1위로 만들어 주었다. 바로 이 지식 검색 서비스가 전문적인 정보가 아닌 우리가 평소에 궁금했었던 것, 혹은 일상생활에 유용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지식검색 서비스가 탄생하기 전 우리는 인터넷 정보를 쌍방향이 아닌 내려받기 식으로만 이용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정보를 줄 수 있고, 정보를 구할 수 있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 것이다. 

 특별히 지식검색 서비스는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정보 이외에 일상적이고 주관적인 정보까지 포괄하기 때문에 인터넷 사용자들의 참여를 더 뜨겁게 해준다. 과거에 ‘명동의 음식점’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면, 몇 개의 음식점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려주는 반면 이 지식검색 서비스는 어떠한 음식점에 어떠한 요리가 맛있다는 답변자들의 주관적인 의견까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식검색서비스가 가진 장점인 것이다. 혹은 개인적인 상담까지 스스럼없이 하는 경우도 있다. 주위 아는 사람에게는 물어볼 수 없는 고민이나 어려운 점들을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한다. 이는 익명으로 접근되어 철저한 신변보호가 가능하기 때문에 질문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곳에서는 개인적인 맞춤형 질문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모르는 수학문제를 풀어달라거나 모르는 영어문장을 해석해 달라는 요구에 답변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준다. 이는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지식이 아니라 질문자들만이 요구하는 맞춤형 답변인 것이다.


  또한 이 지식은 질문과 답변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기 쉽다. 낡고 오래된 지식이 아니라 현재의 유행 속도에 맞는 지식공유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현재 개봉된 영화가 어땠는지, 누가 연기대상을 탈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지식 검색에서 오고 간다. 혹은, 만약 질문자가 라식수술에 관해 묻는다면, 답변자는 라식수술을 잘하는 병원과 더불어 현재 가격이 얼마인지까지 알려준다. 모든 질문과 답변이 현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새롭고 신선한 정보를 전국 각지에서 빠르게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을 거의 모두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이 질문에 누가 답을 해줄까라고 반신반의하며 검색을 한다면, 이미 그 질문은 물론이며 답변까지 끝나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분야를 넘나들어 각 개인의 궁금증을 쉴 새없이 토로한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질문은 겹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질문 작성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검색만 통해서 답변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지식 검색서비스는 질문자 1명에 다수의 답변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을 함께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올려진 질문들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정보들은 계속해서 축적되어지고 그 양은 점점 방대해 지게 된다.

  
  반면, 이 지식검색 서비스의 한계점은 누누이 지적되어왔다. 인터넷 이용자는 누구나 답변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답변의 정확성과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한상완 교수는 “지식은 정보를 조직해 논리를 갖춰야 하며 이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명제”라면서 “공인받지도 않고 책임 소재도 없는 단편적 정보를 ‘지식’이란 이름으로 선전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는 ‘잘못된 지식’이 계속 퍼지면 ‘진짜 지식’은 실종 위기에 다다른다는 경고다. 전자신문사와 온라인 리서치 전문업체인 엠브레인이 조사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식검색이 생활에 도움이 됐다’ 가 84.3%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응답자에 비해 월등이 많았지만 여전히 신뢰성에 있어서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신뢰도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은 이것이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답변이고, 출처가 명확하지 않음을 꼽았다.

 
  따라서 인터넷 지식 검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신뢰성 문제를 보완해야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최대 검색사이트 위키피디아는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사전 항목을 작성하고 수정할 수 있는 개방형 체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정확성과 신뢰성은 굉장히 높다. 이는 전문적 지식을 가진 수천명의 자원봉사 편집자들이 수록내용을 점검하면서 틀린 내용을 바로 잡거나 신규 항목을 추가하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은 지식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질문과 답변을 올리는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제공한다. 하지만 지식검색에 제공되는 정보의 신뢰성을 높이려면 전문가의 선별기능 도입과 평판자본 활용 등을 통해 객관적 평가체계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식검색 서비스는 새롭고 다양한 정보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왜곡되고 잘못된 정보가 난무한다면 그것은 지식이 아닌 쓰레기에 불과하다. 이를 위해 인터넷 업체들은 전문적 지식을 가진 인력을 갖추고 정보의 신뢰성을 높이되, 다양하고 신선한 정보가 잘 공유되도록 보완해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많은 영역에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의 원천이 될 것이다.

by 꼬수☆ | 2007/11/15 08:05 | MEDIA★ | 트랙백 | 덧글(0)

포털 욕 먹는 이유 (기사)

포털이 욕 먹는 '진짜' 이유
[블로터닷넷   2007-06-14 17:17:46] 

포털이 동네북이다. 이곳 저곳에서 마구잡이로 때린다. 지나가는 이들도 일 없이 쿡쿡 찔러보고,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댄다. 아무리 맷집이 좋다지만, 마구잡이식 뭇매에는 당할 도리가 없다. 이대로라면 머잖아 길바닥에 쭉 뻗어버릴 모양새다.

공정위는 국내 주요 포털이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했다며 이참에 대대적인 수술을 실시할 모양세다. 어느 정치인은 포털이 이미 관문 역할을 넘어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며 "사이버 시장에서의 새로운 미디어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고 칼을 벼린다. 일부 단체는 "포털의 거대화로 인해 왜곡된 우리나라의 인터넷 언론 문화를 바로 잡겠다"며 "애국진영의 언론들이 단결하자"는 날선 구호도 마다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얘기를 듣다보면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진다. 정말 포털이 뭇매를 맞을 만큼 잘못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지금의 포털 때리기는 상식을 넘어섰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포털에 대한 지금의 전방위 공격은 중세의 마구잡이식 마녀사냥을 연상시킨다.
포털 로고

지금까지 포털에 붙은 '죄목'을 나열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검색 결과 조작 혹은 담합
• 음란 동영상의 의도적 노출 혹은 늑장대처
• 콘텐츠 제공업체(CP)와의 불공정 거래
• 악성 덧글과 비방글 감시 및 모니터링 책임 소홀

1먼저 악성 덧글과 비방글 문제부터 짚어보자. 최근 서울중앙지법은 김 아무개씨가 네이버·다음·야후·네이트 등 4개 포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포털에 "각각 300~500만원씩 모두 1600만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소송을 낸 김 아무개씨는 2005년 여자친구의 자살과 관련해 악성덧글에 시달렸고, 포털을 통해 관련 기사와 덧글이 확산되자 이를 문제삼고 나섰다.

판결문의 일부를 보자.


"포털이 기사를 작성하지는 않지만 기사를 분류하고 주요화면에 배치하기도 하는 점과 댓글을 통해 기사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포털 사이트가 명예훼손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 인터넷이 여론을 좌우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매체로 자리잡은 만큼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는 불량한 정보의 유통을 방지해 인터넷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견 맞는 얘기다. 악성 덧글을 가만히 보고도 방치한 데 대해서는 포털이 분명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화살끝이 포털만을 겨눈다면 문제가 있다. 먼저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여과없이 자극적으로 가져다쓴 황색 언론들이 무릎 꿇고 반성할 일이다. 포털 메인화면에 걸리기 위해 기사와 무관한 키워드를 억지로 끼워넣고, 자극적인 제목으로 도배해 무차별 쏴대는 기성 언론들이 먼저 부끄러워해야 한다. 뭇매도 이들이 먼저 맞아야 싸다.

그들이 누군가. 애당초 포털이 주는 돈에 눈이 멀어 헐값에 기사를 통째로 넘긴 장본인 아닌가. 그런 자들이 어느 순간 포털의 지배력이 커지자 이제 제몫을 찾겠다며 포털 때리기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주머니는 주머니대로 채우면서 포털에는 트래픽을 돌려달라고 생떼를 쓴다. 그러면서 뒤돌아서서는 포털 대문에 기사를 걸지 못해 안달을 하고 스스로도 코웃음칠 기사들을 양산해낸다. 후안무치요, 불고염치다.

이런 반박도 충분히 가능하다. "한 번이라도 악성 덧글로 피해를 봤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맞는 말씀이다. 나 또한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악성 덧글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도 많다. 앞뒤 없는 비난이나 도가 지나친 비아냥거림에 화가 치민 적도 있다. 물론 최근 보도된 악성 덧글이 불러일으킨 여학생 자살 소식처럼 극단적인 단계까지 이르진 않았다. 요컨대, 악성 덧글의 폐해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악성 덧글이 비단 포털만의 문제일까. 사람들이 모이는 인터넷 게시판이라면 어김없이 누리꾼의 반응(덧글이나 댓글)이 올라오고, 이 가운데는 흙탕물을 일으키는 악의적인 비방글이 어김없이 포함돼 있다.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 커뮤니티나 지식검색 서비스, 언론사 기사나 방송국 동영상 등도 이미 넘쳐나는 악성 덧글로 몸살을 앓은 지 오래다. 외국에서는 상식 이하의 비방글을 블로그 주인이 임의로 삭제할 수 있도록 하는 '블로그 가이드라인'까지 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악성 덧글은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이지, 포털만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포털에 올라온 악성 덧글은 누리꾼에게 보다 많이, 그리고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포털에는 커뮤니티나 개인 홈페이지, 블로그 등의 공간보다 훨씬 엄격한 관리책임 의무를 부과한다. 포털 차원에서도 자체적인 관리감독 및 모니터링 전담반을 구성하고 24시간 감시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악성 덧글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열 순사가 도둑 하나 못 잡는다잖는가.

그러므로 포털은 감시인원을 더욱 늘려야 한다. 시스템 구축에도 보다 많은 노력과 자금을 투입하고, 관련 기술도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포털이 책임을 방기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 당신이 포털 게시판 관리자라면, 보기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비방글이 올라왔을 때 일부러 방치해두겠는가. 무슨 이유로? 방치해뒀다고 해서 어떤 이득이 있다고? 포털더러 관리감독 시스템을 지금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이런 식으로 직무유기 운운하며 규제의 칼날부터 들이대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이요, 정치적인 대응이다. 일부 보수언론 연합체가 주도하는 포털 규제 입법 움직임은 그런 점에서 볼 때 포털을 견제하는 게 아니라 입맛대로 길들이겠다는 정치적 선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2음란 동영상 노출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난 4월9일 새벽, 다음 tv팟에 음란동영상이 무더기로 올라와 2시간여동안 방치된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해 9월에는 네이버 블로그에 변태성 동영상이 18일동안 방치된 사실이 알려져 거센 비난이 일었다. 야후는 지난 3월 음란 동영상 문제로 뭇매를 맞은 뒤 아예 동영상 UCC 서비스를 폐쇄했다. 포털의 음란 동영상 노출 사고는 이 밖에도 여러 건이 있다.

음란물이 무방비로 노출된 데 대해서는 포털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본다. 욕을 먹는 것도 당연지사다. 그렇지만 이 문제 역시 포털의 음란물 방지 시스템 강화를 주문할 일이지, '일부러 방치했다'는 식의 감정적 대응은 곤란하다.

정말로 포털이 음란물이 올라온 것을 보고도 '일부러' '방치'할 수 있을까. 일개 감시팀 직원이나 팀장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어이, 김대리. 지금 올라온 음란물, 두어시간만 그대로 둬!" 정말로 그랬다가는 제 목부터 달아날 일이다. 그렇다고 의사결정 책임권을 가진 포털 서비스 책임자가 그렇게 결정했다고 의심하기엔 떠안아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내가 너무 순진한 걸까.

백번 양보해 일부러 방치했다고 치자. 그렇게까지 해서 포털이 얻는 건 무엇인가. 트래픽? 포털은 이미 감당할 수 없을만큼 많이 받고 있다. 화젯거리? 포털로선 이런 문제에 관한 한 되도록 입에 오르내리지 않길 바랄 게다. '일부러' '방치'해서 얻을 이익이 없다는 얘기다.

음란물 노출은 말 그대로 '사고'다. 사고는 의도하지 않은 데서 발생한다. 그렇지만 사고는 노력 여하에 따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포털에게 주문할 것은 단 하나다. '음란물 노출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더욱 강화하라.' 하지만 이런 식은 곤란하다. '포털 이 XX들, 순 양아치 아냐!'

3그 다음, 검색 결과 조작에 관한 죄목이다. 이 문제는 지금의 국내포털 시스템에 비춰보면 영원히 제거될 수 없는 지적이다. 국내 포털은 검색 결과에 인위적인 사람의 손길이 더해진다. 그것이 뉴스든 블로그든 카페검색이든 마찬가지다. 자동으로 로봇이 웹페이지를 긁어오는 웹검색만 예외라면 예외일까. 이는 구글과 국내 포털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국내 이용자들은 포털이 파이프를 박고, 깁고, 이어주는 정보의 구조물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이런 독특한 국내 포털의 서비스 구조를 외국 서비스와의 경쟁력으로 꼽는 전문가도 많다.

이 모든 것은 말하자면 '검색결과 조작'이다. 이 결과에는 의도하든 아니든, 많건 적건, 운영자의 판단이 개입된다. 아무리 기준을 세우고 기술로 자동 분류해도 최소한의 판단 기준은 사람 손에 남겨진다. 그것이 지금 국내 포털의 시스템이다.

유독 검색결과 조작을 문제삼는 곳은 뉴스서비스다. 포털에 기사를 공급하는 언론사들은 '메인화면 뉴스 선정 기준이 뭐냐'며 기준 공개를 요구한다. '선정적인 기사가 자주 올라온다'느니, '포털을 욕하는 기사는 메인화면에 안 걸린다'는 둥, '특정 정당에 유리한 식으로 제목을 조작한다'는 식의 잽도 쉴새없이 날린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는 양날의 칼과도 같다. 언론사도 이익집단이다. 한 언론사의 기사가 메인화면에 걸리면, 다른 견해를 표방하는 언론사의 항의가 잇따른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사 성격에 따라서도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가십성 연예기사가 올라오면 '재미있는 기사가 많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체신머리 없다'며 혀를 차는 독자도 있다. 좁은 공간에 한정된 기사를 올리다보면 이런 잡음은 비껴갈 수 없다.

'독자위원회'같은 조직이 필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잡음이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네이버나 다음, 네이트닷컴 등은 저마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자사에 올라오는 기사 내용을 모니터링하고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독자위원회를 별도로 두고 있다. 허나, 이들도 하루에도 수백건씩 넘쳐나는 기사들 속에서 가치중립적인 모니터링을 실시하기엔 역부족인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하나다. 포털이 인위적인 개입을 중단하면 된다. 구글처럼 모든 기사는 아웃링크로 제공하고, 철저히 기술적인 분류에 의해 뉴스 메뉴에 뿌려주기만 하는 것이다. 제목도 건드려선 안 된다. 그러려면 뉴스 서비스 화면의 폭이 지금보다 넓어져야 한다. 언론사에서 보내온 기사 제목이 잘리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대신 선정적이거나 이른바 '낚시성' 제목에 대해서는 온전히 해당 언론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기사와 무관한 자극적인 제목으로 독자들을 유도한 혐의가 인정되면 해당 트래픽을 통해 얻은 이익만큼 사회에 되돌려주는 '트래픽 환원제'같은 제도도 생각해 볼 만하다. 그래야 언론도 지금보다 책임 있는 기사, 보다 신중한 제목을 고민함으로써 더 나은 언론으로 거듭날 수 있다. 자연스레 악성덧글에 대한 책임소재도 교통정리된다. 해당 언론사가 관리의 몫을 떠안기 때문이다.

4마지막으로 CP와의 불공정 거래 문제.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가 포털에 덧붙은 '죄목' 가운데 진정 혼나야 할 고약한 버릇이라고 생각한다. 포털에 주어진 권력은 누리꾼에게서 나온다. 포털을 이용하는 누리꾼들은 정보와 콘텐츠를 제공하고 부지런히 발도장을 찍으며 포털을 알린다. 그 대가로 누리꾼이 받는 것은 약간의 개인공간과 e메일 계정 정도다. 포털이 트래픽이나 UCC를 이용해 거둬들이는 검색광고 수익이나 서비스 가치에 비하면 참으로 하잘 것 없다 하겠다.

더구나 포털은 이렇게 얻은 권력을 엉뚱하게도 CP를 흔드는 데 휘두른다. 이용자들이 제공한 콘텐츠를 자기네 데이터베이스 우물 안에 가둬놓고, 우물을 찾는 나그네에게 물세와 자릿세를 받는다. 따로 계약을 맺고 콘텐츠를 제공하려는 CP에게는 상도덕이 용납할 수 없는 계약서를 들이민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갑을관계는 이렇게 성립된다.

얼마전 네이버와 맺고 있던 제휴를 깬 올블로그의 유정원 사장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포털과의 제휴에서 95% 이상의 CP가 손해를 본다"고 말했다. 물론 네이버를 포함한 포털이 모든 계약에서 횡포를 일삼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업체간 계약은 제3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당사자들의 미묘한 이해관계가 포함된다. 한쪽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포털-CP 거래는 포털의 횡포가 상당수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받는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콘텐츠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려는 인식부터 갖춰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이제부터다. 포털은 CP에 휘두르던 무소불위의 칼을 개인 이용자들에게도 들이대려 한다. 내 집에 입주했으니 가구도 허락받고 들여야 하고, 친구도 함부로 초대하지 말라고 한다. 집단장을 할 때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자기네 울타리에만 이용자를 묶어두고 '나가려거든 짐 싸서 가라'고 큰소리친다. 그러면서 잡상인들을 불러들여 장터를 벌여놓고는 수익을 고스란히 주머니에 챙긴다. 심지어는 입주자의 재산을 멋대로 가져다 돈벌이에 쓴다. 옆집 감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왔다고 해서 내 것이라고 우기는 모양새다.

인터넷 시대의 관문을 자처하는 포털이 인터넷의 근본 속성을 외면하고 있다. 포털이 욕 먹는 '진짜' 이유는 이것이다. 주요 포털은 지금이라도 데이터베이스의 울타리를 걷고 검색의 지평을 사이버 공간으로 공평하게 확장해야 한다. 검색 결과를 보다 공정하게 보여주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확도보다 중요한 건 공정함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포털을 지속가능한 서비스로 만드는 길이라고 본다.

포털은 '플랫폼'이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검색 결과의 정확도는 구글의 '페이지랭크'처럼 집단지성의 힘에 맡기면 된다. 진정한 독점은 시장점유율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일방적 횡포에서 나온다.

by 꼬수☆ | 2007/11/13 09:32 | MEDIA★ | 트랙백 | 덧글(0)

nexting 하지 않는 삶

선택에서 nexting 이 잠깐 나왔다.
nexting 은 지금이 아닌 다음 일어날 일에 대한 계획이자 예측이다.
사람은 항상 nexting 한다, 심지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원숭이도 nexting 한다.
우리는 순간이 아닌 항상 그 다음 일어날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이지 다음이 아니다.
내가 고민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순간이다.

그런데 사람은 항상 지금을 생각하지 않고 다음에 일어날 것에 두려워하고 걱정한다.
어떤 사람이 중대한 프리젠테이션을 내일 가지고 있다. 그는 그 전날부터 내일 있을 프리젠테이션에 긴장하고
걱정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주어진 일은 프리젠테이션을 잘 준비하는 것이다. 그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은
완벽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단계이지 내일 대중들 앞에서 떨면서 발표하는 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일 걱정은 내일하라'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지금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달력에 스케줄을 표시해보자.
모레에 제출해야할 과제가 있다. 그러면 내일은 그 과제를 하는 날로 표시를 하고, 모레는 제출하는 날로 표시한다.
그러면 나는 오늘은 그 과제에 대해서는 일단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달력을 체크해 보고
과제 하는 표시를 발견했다면, 내일은 그 과제를 하면 된다. 

지금 나는 오전에 학교를 다니고 오후에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내가 수업을 듣는 입장이니 비교적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하다.
하지만 항상 일을 가기전에는 내가 가르쳐야하는 입장이라 부담감이 있고 걱정된다. 
그러면 아침부터 계속 일에 대해 걱정만 하기 시작한다. 아, 오늘은 또 어떻게 가르치지, 어떻게 애들을 다루지,
하지만 그렇게 아침부터 일 하러가기전까지의 걱정은 아무 쓸모 없는 걱정이다.
결국 일하러 가기 전까지, 나는 머리로 걱정만 할 뿐, 실제로 그 걱정을 주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
나는 그러한 걱정은 실제로 학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순간에 하면 된다.

사실상 정말로 학원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그런 걱정을 할 수가 없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면 다른 잡념, 걱정이 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걱정을 하는 것은 모두, 우리가 nexting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나는 nexting 하지 않는 삶을 생각해본다.
물론 완벽하게 nexting 이 차단되면 나는 미래에 대한 아무 계획도 할 수 없지만,
다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꽤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나는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우리 뇌속에 있는 전두엽이 손상되면 우리는 미래를 계획하거나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전두엽이 손상된 이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환자들을 가리켜 '현재 자극에 묶여 있는' 존재,
'즉각적인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는' 존재, 또는 '그때 그때의 현실만 따르는' 존재라고 표현한다. 

전두엽이 손상된 한 환자의 인터뷰를 보자

심리학자: 내일은 뭘 해볼 생각이세요?
N: 모르겠는데요
심리학자: 제 질문이 뭐였는지 기억나세요?
N: 내일은 뭘 해볼 거냐고 물어보신 거요?
심리학자: 맞아요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할 때의
마음 상태를 말씀해보실래요?
N: 백지상태라고나 할까요. 그냥 졸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아무것도 없는 방에 있는데
누군가가 제게 의자를 찾아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거기엔 아무 것도 없는 데 말이죠.
호수 가운데에서 수영하는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하고요. 
그 순간 저를 붙잡아주는 것도없고
그냥 어떻게 할 수 없는 느낌 같은 것 말이에요

 [Stumbling on HAPPINESS /발췌]

 
N에게 내일은 언제나 텅 빈 방과 같은 개념이고 그가 마음속으로 '나중'을 그려보려고 할 때면 마치
우리가 비존재나 무한함 같은 것을 상상할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두엽손상은 계획하는 능력과 불안에 반응하는 능력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킨다.
이렇게 전두엽이 손상되면 우리는 미래를 상상할 수도, 계획할 수도 , 예측할 수도 없다.

하지만 더불어 미래에 대한 불안 걱정은 없어질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전두엽이 손상되어 NEXTING 하지 않는 삶을 꿈꿔본다.
단지 주어진 현실에만 충실하고 다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도록.


   

by 꼬수☆ | 2007/11/08 13:31 | BASKET★ | 트랙백 | 덧글(0)

선택

나는 신을 믿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에 따른 하나님을 믿는다. 
기독교의 예정론에 따르면 이미 구원받는 자들은 예정되어 있다.
또한 각 개인에 대한 계획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셨다.
일단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일단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에 대한 계획을 하나님께서 이미 하셨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미 정해진 내 인생,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건가?
 자, 한 번 어렸을 적부터 세뇌당했던 것들을 차근 차근 꺼내서 한번 풀어보자.
1.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에 대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2. 하나님은 날 사랑하신다.
3. 하나님께서는 나를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4. 나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일단, 1,2,3 은 모두 연결이 된다 하지만, 4번과는 매끄럽지가 않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데,
나는 내 인생 안에서 스스로 선택할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는것이다.

이부분에서 항상  이분법적인 믿음으로 일관해 왔다.

오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라는 영국의 심리학자가 쓴 책에서
동물들은 nexting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nexting 이란 다음에 할 것을 미리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기는 커다란 빨간 블록이 작은 노란 블록을 쳐서 노란 블록이 화면에서 사라지면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노란 블록이 부딪힌 후에 잠시 정지 상태에 있다가 다시 움직여
화면밖으로 사라지면 아기는 마치 엄청난 기차 전복사고를 본 것처럼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노란 블록의 움직임이 아기의 뇌가 계속 다음 상황을 생각하면서 만들어낸 예측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원숭이는 연구자가 긴 상자 몇개 중 하나에 공을 떨어뜨리면 공이 들어간 상자의 바닥을 재빨리 바라보면서
그 공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이 때 실험적 조작을 통해 그 공이 처음에 들어간 상자가 아닌 다른 상자에서 나오면 원숭이는 깜짝 놀란다.
이는 아마도 원숭이의 뇌가 다음을 생각하고 nexting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이 이렇게 미래를 예측하고 nexting 한다는 것에서
그냥 문득,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앞서 찾지 못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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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배우자감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사람이 있을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해 놓으셨다는 전제하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 모순 속에서 나는 얼마 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 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5년 동안 키운 강아지가 있다.
나는 이 강아지에 대해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언제 밥을 줄 것이고, 언제 산책을 갈 것이며, 언제 짝을 만들어 줄 것이며,
심지어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조금 잔인하기는 하지만 죽는 날을 앞당길 수도 있다.
자, 나는 이 강아지 보다 한 차원 높이 존재하며, 이 강아지의 삶을 계획하고 통제할 수도 있다.


반면, 나는 이 강아지에 대해 한 생애 계획을 다 잡아놓았지만,
그 강아지는 내가 원하는 때에 밥을 먹기 싫을 때가 있고, 내가 정해 준 짝이 마음에 안 들 수가 있다.
여기서, 나는 강아지를 아주 사랑하기에
이 강아지의 원하는 것, 강아지가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을 해 줄 의향이 있다.  
이 강아지가 지금 밥을 먹을 때가 아닌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간절히 밥을 원할때
나는 비록 이것이 내 계획에 어긋나더라도 밥을 줄 것이다.   




내가 정해 준 짝은 같은 종의 푸들인데, 이 강아지가 다른 종의 요크셔테리아를 더 좋아한다면,
순종을 이으려는 내 계획에 어긋나더라도, 혹은 안좋은 결과를 낳더라도 그 강아지가 더 원하는 짝을
만들어 줄것이다. 
나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놓았었지만 이 강아지가 더 원하고, 그가 선택하는 것으로 바꾸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 강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만, 여기에서 철저히 강아지를 통제하기도 한다. 강아지가 아주 아플때, 아무 음식이나 함부로 먹어서는 안될떄
나는 철저히, 통제한다, 그 강아지가 아무리 애처럽고 불쌍한 눈빛으로 고기를 달라고 하더라도, 나는 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나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의 배우자를 선택해 놓으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바꿔 주실지 모른다.
그것이 아주 악으로 들어가는 길만 아니라면, 적절한 선 안에서, 내가 선택하게 두실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선택은 두가지다.


by 꼬수☆ | 2007/11/06 22:26 | BASKET★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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